제1장: 전주의 청담동

우리 집 앞에 미용실이 생겼다.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던 빈 공간에 “청담동”이라는 이름의 미용실이 새롭게 열렸다. 하지만 우리 집은 전주에 있고 정확히는 효자동이다. 서울의 청담동 분위기를 빌려 전주라는 지리적 위치를 초월하려는 셈인가 보다. 즉, 언어의 제스처 - 탈脫전주, 청담동 - 와 공간의 봉사 - 분위기, 미용 - 의 시너지인 셈이다. 누구가는 분명 그 시너지를 맛볼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나는 미용을 즐기는 편도 아니고 청담동에 대한 기대감이나 환상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라 별로 그 시너지가 내키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이 미용실의 사진을 찍은 이유는 존재한다. 바로 나는 이 청담동이 사라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꽤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가 없다. 내가 미래를 예지하는 것도 아닐 텐데, 대체 어떻게 청담동이 사라질 것을 알 거란 말인가. 나는 우선 공간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해야겠다.

공간은 본질적으로 위치를 고수하지만, 변형에 유연하다. 오랜 시간 동안 공간은 똑같은 공간으로 존재해왔지만, 공간의 기능과 모습이 달라져 왔다. 인간에 의해 기능과 모습이 끊임없이 변형되고 그 변화 속에서 공간의 영혼은 겹겹이 쌓여간다. 미용실 청담동은 2년 전에 편의점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수많은 겹들로 존재해왔다. 미용실 청담동은 언젠가 사라질 거라는 것을 정확히 여기서 알 수 있다. 언젠가 다른 겹으로 덮일 것을 어렴풋이 확신할 수 있다.

미용실 청담동, 전주시 완산구 홍산 1길, 35°48'53.2"N 127°06'24.5"E

7-Eleven, 전주시 완산구 홍산 1길, 35°48'53.2"N 127°06'24.5"E

나는 2리터 생수 6병을 사러 1달에 2, 3번은 편의점에 들락거렸을 때, 혹은 그 공간의 영혼이 편의점이라는 겹을 쌓고 있었을 때, 그 역사에 함께 할 수 있었다. 과거를 돌이켜보았을 때 그 편의점이라는 공간의 미시 역사에 내가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을 미용실 청담동이라는 겹으로 덮어 버리고 공간의 새로운 역사를 건설 중인 현장에서 나는 빠져있다. 관련이 상실된 겹보다는 과거의 내가 물리적인, 경제적인 교류를 했던 같은 공간의 지난 겹에 나는 더욱 애착이 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위 두 사진 중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은 청담동 사진뿐이다. 편의점 사진은 구글을 통해 운 좋게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애착이 있었더라면 편의점 사진을 찍어두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미용실의 탄생과 함께 편의점의 죽음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 쓴 글들은 미용실의 탄생과 함께 태어났다고 해도 무방하다. 나의 애착도 마찬가지이다. 죽음 후 찾아오는 집착이다.

하지만 최근 나는 이것보다 훨씬 나를 매료한 경험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아무런 교류가 있을 수 없었던 과거의 겹들에 대한 애착/집착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 그 시대의 유일무이한, 내가 지레짐작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에 대한 애착. 과거 속 선망하는 대상이 내뿜는 끔찍하리만치 침묵하는 유혹. 그 침묵이야말로 알고 싶어 하는 욕망에 불을 지핀다. 인간에게 있어 지성이란 본질적으로 침묵을 깨는 것이고, 무지를 채워줄 답을 향한 무수한 갈망이 아이스브레이커icebreaker가 된다. 바로 그 갈망에서 자크 데리다가 말한 아카이브에 대한 열병이 시작된다.

 

제2장: Jokerred와 유령들

뉴 논스톱 클럽 조커레드 장면(좌,우)

2000년에 방영을 시작한 뉴 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이 있었다. 극중 인물 중 “동근”(배우 양동근)이 클럽에 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소가 Joker Red이다. 좌측 사진 속에 우연히 클럽 온라인 사이트도 적혀있어 들어가 보았다. 엄청난 아카이브였다. 자세히 알아보니 2000년대에 홍대에서 잘나가던 클럽이었는데 어느 순간 문을 닫고 그 이름과 역사는 아카이브 안에서만 존재하게 된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침묵하는 아카이브에 애착이 생긴 걸까? 뉴 논스톱을 보고 찾아간 이 아카이브에 내가 “jokerred”된 걸 알면서도… 다르게 말해, 나는 아카이브에 내재되어 있는 “실존existence”을 기대했지만 정작 “유령Spectre”을 맞닥트렸을 뿐이었음에도…

[유령 등장]

마셀러스: 조용! 저기 그 놈이 다시 나타났네!

버나도: 돌아가신 선왕과 똑 같은 모습으로.

마셀러스: 자넨 학자 아닌가, 호레이쇼, 어서 말 좀 걸어보게.

버나도: 선왕처럼 보이지 않는가?

호레이쇼: 너무나 닮았어. 이거야 원 무섭고 떨려서.

버나도: 말 좀 붙여 보라니까.

마셀러스: 뭐라도 좀 물어보게, 호레이쇼.

호레이쇼: 대체 넌 누구 길래 돌아가신 선왕의 자태를 하고서 나타난 것이냐?

하늘에 대고 명하노니, 대답하라!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시끄러운 과거의 모습이 결국은 나에게 끔찍한 침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애착은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Punctum에 기반을 두지 않았나 싶다. 즉, 이들이 한때 “존재”했었다는 “사실”과 언젠가 그 순간도 “지나간다”는 것 (조금 더 본질적으로 나아가 결국은 언젠가 너도 죽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상기까지)을 내포한 사진이 나를 매료시킨 것이다.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반항이 아닌 수락. 그것이 “사진을 찍힌다”는 것의 의미이다. 이들의 사진이 찍힌 이유는 조커레드가 언젠가 사라질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조커레드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은 아닐 것이다.

이들은 자크 데리다가 말하는 아카이브의 본질 - 태고Archaic의 절대적 출발점으로 돌아가려는 욕망 - 과 죽음 충동을 껴안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고 있다. 죽음 충동이란 무생물로 돌아가려는 충동이다. 부연 설명을 해보자면, 사진 속 시간은 흐르기를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사진을 후에 다시 보게 된다면 시간의 흐름은 더욱 강렬하게 체감된다. 시간의 흐름 끝에는 죽음이 존재하고 있고 사진은 그걸 상기시키는 지표이기에 사진을 찍힌다는 행위는 죽음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사라지는 것을 수락했기 때문에 사진을 찍히는 순간 그들은 사진적 죽음을 맞이하는 셈이다. 더욱더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죽음이라는 욕망, 무無의 상태로의 회귀를 끝내 허용하는 행위. 이들이 비로소 움직일 수 있을 때 (카메라에서 해방되었을 때) 뒤를 돌아보면 그 자리에는 희미하게 그들의 유령이 남아있다.

밀란 쿤데라에게 등장인물들은 작중 개념들을 상징하기 위해 각 주장문에서 탄생한 것처럼, 이들은 조커레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진에서 탄생한 것이다. 적어도 독자에게 있어서는. 고로 조커레드가 무無의 상태로 회귀한 지금 유일하게 조커레드를 기억하는 유령들이랄까. 그러나 이들의 사진적 죽음은 유령이 되기 위함이다. 조커레드를 배회하며 과거의 영광을 들려주기 (보여주기) 위해. 셰익스피어 문학 학자 A. C Bradley 는 유령이란 “일상적인 경험과 더 넓은 삶을 연결하는 상징이자 더 넓은 세계를 환기하는 존재”라고 정의를 한다. 햄릿의 서사가 유령과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면 조커레드에 대한 나의 애착과 이 여정은 조커레드의 유령들 때문일 것이다.

유령: …나는 이제 가야 한다. 반딧불 희미한 불빛마저 이지러지는 것을 보니 아침이 가까웠구나. 햄릿, 잘 있어라, 잘 있어라, 잘 있어라, 나를 기억해라.

[퇴장]

제3장: 추적

빨갛게 상기된 뜨거운 철이 찬물을 듬뿍 맞은 후 열들은 이쯤 하면 됐다며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무한히 광활한 하늘로 흩어져 나갔다. 철은 밤이 되자 차가운 공기에 식어만 가고, 새벽을 맞이하기에 더 이상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저 밤의 끝자락을 잡아보자는 마음으로 예전 운영자든, 관계자든 연락을 취하고 싶었다. 온라인 사이트에 적힌 문의 이메일 주소로 연락을 해봤지만, 주소가 휴면상태인지 발송 실패 안내만 돌아왔다. 그러다 우연히 예전에 이 클럽에서 일했던 디제이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알게 되어 자세히 여쭤보았지만, 여전히 수확은 없었다.

밤의 끝자락을 놓쳤어도 나는 이른 새벽빛이 스며드는 그 구석을 찾아갔다. 무언가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예전 조커레드가 있었던 장소를 찾아가 보았다.

B1 Hongdae (구舊 조커레드)입구, 지하1층

입구 옆

빌딩 측면, 낙서들

홈페이지가 없었더라면 존재했었을 거라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로 조커레드는 없어졌다. 적어도 건물 외관에 쓰인 낙서 중 하나만큼은 조커레드 상징(아래)이지 않을까 싶어 자세히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찾을 수 없었다. 건물 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지하는 늦은 밤에 영업 하기에 문이 닫혀있었고, 위에는 무슨 사업장인지 몰랐지만, 어디에서도 조커레드의 흔적은 찾아 볼수가 없었다.

조커레드의 상징


제4장: 카플란의 죽음

마치 히치콕의 영화 - North by Northwest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 에서 “North by Northwest”는 일종의 환상, 나침반에도 존재하지 않는 방위를 뜻하는 것처럼(영화의 플롯 자체가 환상을 좆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나는 조커레드라는 환상을 좇았던 것이었나. 그러나 Thornhill손힐이 실재하지 않는 인물 Kaplan카플란을 쫒는 것과는 달리 (그에겐 카플란의 사진이 없었다) 나는 사진과 증언이 있었기에 실재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환상이라고 느낄 정도로 그 공간 자체에 관련된 물질적 증거가 없었다.

윗글에서 얘기했듯이 겹이 완전히 덮여 버렸다. 이제는 하나의 무덤이 된 셈이다. 공간의 죽음. 그저 유령들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진을 봐줄) 세월의 이방인을 반길 뿐이다.

손힐: 아, 당신이?

당신이 카플란이군!


교수: 아니오, 카플란은 존재하지도 않지


손힐: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그의 방에도 가봤소

그의 양복도 봤는데? 키가 작고 비듬도 있어요


교수: 나를 믿어요.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오


나는 여기서 카플란의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카플란의 실존을 믿는 사람들에게 카플란이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카플란은 죽고 만다. 이러한 죽음은 어떠한가. 믿음으로 탄생한 인물의 문학적 죽음. 문장으로 태어나 문장으로 죽는 이 기이한 현상이 마치 사진으로 태어나 동시에 사진으로 죽는 현상과 유사하지 않은가.

햄릿도, 손힐도 나도 그저 유령/아카이브를 좇은 것뿐이다. 그리고 그 끝에 우리가 목격한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데리다가 아카이브의 궁극적 의의는 미래에 도래할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것에 있다고 한 것처럼, 조커레드의 죽음을 목격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미용실 청담동을 찍을 수 있었다. 나에게 그 사진은 새로운 겹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으며 동시에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다.